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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화원이 세벌식 글자판 권고안을 낼 때까지의 입장

지난주에 종로 YMCA 앞에서 송 현 한글문화원 원장님을 뵙고 의견 일치를 본 부분이라 메모해 둡니다.

  • (한글문화원은 모든 기기간의 일반적인 글자판 배열은 같아야 한다.) = 변화가 없기 때문에 달리 논의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 현재 세벌식 글자판은 390 배열과 최종 배열이 주로 쓰이고 있다.
  • 휴대폰용 한 손 글자판은 표준이 정해지지 않다 보니,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꾸준히 나와서 두벌식 입력 방식이지만 한손 입력 방식에 상당한 발전을 가져오는 순작용도 있었다.
  • 한글문화원에서는 세벌식 한손 입력 방식을 당분간은 한 가지 방안으로 단일화하지 않고 좋은 방안이 나오면 제1 권고안, 제2 권고안, 제3 권고안 정도를 추인하려고 한다. 그러다 더 좋은 방안이 나오면 기존 안 중에서 하나를 대치해 나가고, 그러다 어느 시점에 한두 가지로 권고안을 줄여 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 터치 타이핑 방식의 일상적인 세벌식 글자판 배열은 390 자판과 최종 자판을 권고안으로 당분간 유지한다. 나중에 본격적인 표준 자판 연구가 시작되면, 그때 전반적으로 세벌식 표준 자판 배열에 대하여 연구 검토한다.

내가 만든 또 하나의 SW가 사라지다: 핸드스토리

지난달에 내가 자주 들러는 클리앙 사이트에서 나모의 “핸드스토리 서비스 종료 공지” 소식을 접했다.

2000년 가을에 나모를 떠나 보스톤으로 휴가를 가서 쓰기 시작한 팜(Palm) PDA.

그때 보스톤에 살던 박 종천 실장네 집에 도착해서 이틀째인가에 샀던 팜 Vx가 내가 쓰기 시작한 첫번째 PDA였고, 사용하다 보니 피씨와 팜 사이의 자료 교환(담아가서 읽기, 클리핑)이 필요해서 박 실장에게 만들게 하면서 시작된 “핸드스토리!”

그때 보스톤의 가을은 눈부셨다!

2001년 초에 본격적으로 개발에 들어가면서 팜용 개발자 한 명을 충원하고, 봄에는 서울에서 이 영식 팀장을 몇 주 동안 보스톤 숙소에 데려와서 클리핑 스크립트 개발을 하게 했고, 2001년 가을쯤인가에 나모의 제품으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보스톤의 겨울 눈에 신난 두 아이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내가 만들었다고 하지 못하는 상황이 당시에는 많이 어색했다. 코스닥 상장회사라는 제약이 뭔지… 지금 생각해도 나는 기업을 공개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상장한 것 같다. 그리고 그 끝은 더 모양새가 나쁘게 끝났다. 자신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 모양이다. 어쨌건 그 당시에는 내가 개발한 핸드스토리를 남이 개발한 것을 사들이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003년 봄에 나모를 넘겨주면서 자연이 잊고 지냈는데, 핸드스토리는 서비스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다가 이달 말일부로 완전히 종료되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참 애착이 많이 갔던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동안 많은 사용자들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아이폰이 나오면서 전 세계적으로 스마트폰 열풍이 일어났고, 구글의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한 아이폰 경쟁 제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시장에 나오고 있으며, 올해 말쯤이면 MS의 윈도우폰도 시장에 나올 예정으로 되어 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올해부터 모바일앱 개발로 IT 업계에 몇 년만에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고, 한글 세벌식 한손 입력용 노트앱인 “세나”(아이폰용)와 “세나 두손”(아이패드용)을 만들어 앱 스토어에 올렸다. 그리고 iOS4에서도 작동하는 한손 “세나2″를 올려서 앱 스토어에 승인 대기 중이다.

한번도 GUI 프로그램 개발 경험 없이 C와 자바 프로그램만 개발해 온 분과 함께 아이폰용 뉴스 앱을 개발했다. 내 스스로 평가하기에, 다른 국내 뉴스 앱보다 한결 안정성 있으면서 호환성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워낙 사용자가 적은 사이트의 앱이라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지만…

또 아이폰에서 SAP 서버와 실시간으로 연동해서 데이터를 주고 받는 앱을 네 가지를 개발했고, 이달에는 공기업의 홍보용 앱을 의뢰받아 개발해서 넘겨야 한다.

2010년 한 해 동안 부지런히 실력을 연마하여 예전의 감각 이상을 구현해 나가는 것이 올해 첫날 아침의 목표였는데, 막상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가 보니, 예전의 감각이 그다지 줄지 않은 것 같았고, 그 사이의 연륜과 경험이 더해져서 오히려 더 성숙된 듯한 느낌이다.

젊고 실력있는 개발자들을 다시 만나서, 그들과 함께 나의 경험과 비전을 함께 가꾸어 나가고 싶다!

0955+ 딸과 1240+ 아들을 둔 0330 아빠!

제 딸은 0955+(7일부터 S60인데 5일에 태어남), 아들은 1240+(7일까지가 S40인데 1일에 태어남)이고, 아빠인 저는 0330입니다.

오랫만에 기숙사에서 집에 온 딸아이를 반기며 가족이 점심 식사를 하러 갔는데, 저는 깔끔한 반바지와 깃없는 티셔츠에 운동화 차림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제 딸의 첫마디, “헛, 오늘도 집바지 입고 나가시는군요~”였습니다.

“휴일에 가족들과 식사하러 나가면서 간편하게 입었는데, 왜? 니가 보기에는 좀 모양 떨어지니?”하고 말하는 순간,

속으로 ‘아차, 얘네가 S60이랑 X12였지…’ 싶었습니다.

정반대쪽 코드와는 "상충", 반대쪽 좌우 코드와는 "원진"(거의 상충) 관계다.

이제 아이들과 외출할 때는 좀더 격식 있는 옷차림을 하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까워지게 하는 것보다는 부모가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빠를 것 같아서요.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깔끔한” 외출용 반바지를 입느라고 골랐지만,
S55+(거의 S60)인 딸의 눈에는 그래 봤자 “집바지”로만 보이는 거죠.

바이오코드를 알기 때문에 상대의 입장(아이들)에서 이해할 수 있지, 몰랐다면 아이들과 점점 거리감만 쌓이게 되는 가족 구성원이 아닐까 싶네요.

아빠와 정 반대 코드인 두 아이들과는 달리, 그나마 두 아이들은 서로 조화로운 코드라서,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참 좋습니다.

제 가 남에게 민폐 끼치는 사람이나 경우를 무척 싫어하다 보니, 살면서 저절로 저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X12나 S60 코드인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더군요. 그런데 S30인 저에게는 12나 60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무척 답답해 보일 때가 많은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제 본심이거든요.

‘꼭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야 돼?’,

‘그렇게까지 격식을 차려야 해요? 사람의 진심은 통하지 않을까요? 그냥 형식 차리지 말고(넘겨뛰고) 솔직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기능성도 꽝이면서 쓰기도 불편한데다, 무겁고 모양만 낸 제품들만 사는 이유가 뭐야?’

‘어우~ 답답해…’

이런 소리를 속으로 내뱉는 경우가 많거든요.ㅎㅎㅎ

그런데 두 아이(고2, 중2) 모두가 S60과 X12 코드라니, 어쩌면 이런 걸 두고 숙명이라고들 하나요?
(그래도 아는 만큼 실마리도 보이니까, 바이오코드 덕분이겠지요…)

<덧붙임>
아뿔싸… 10년 가까이 바이오코드를 공부해 오면서 등잔 밑이 어두워도 정도가 있지, 제가 딸 아이와는 X코드가 03-09로 충, S코드는 30-55+로 원진(거의 충)이고; 아들 녀석과는 X-S코드가 03-40+로 원진(충에 가까운), S-X코드는 30-12로 충이었네요.

어이쿠…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나눔을 가져야겠네요. 그래서 충과 원진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먼곳을 볼 필요도 없이, 나의 가족 안에 바이오코드 관계 분석 공부의 극명한 사례를 다 가지고 있었네요. (지금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음!) 게다가 집사람은 항성-항성 코드구요^^; 바이오코드와 저의 만남은 그냥 운이 좋아서 만나게 된 것은 아닌가 봅니다…

혁명과 학문, 섹스의 공통점 / 박노자

원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4917.html

제가 체 게바라 관련의 일화 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스토리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가 혁명이 승리한 뒤에 관료직을 하면서도 밤에 아바나의 부둣가에서 짐꾼으로 ‘아르바이트’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권을 잡은 뒤에는 얼마든지 자신의 월급을 높이 책정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정부 일이 아닌 육체 노동으로 ‘용돈’을 벌었다는 ‘혁명 지도자’…. 누가 그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혁명은 사랑과 같다, 사랑을 돈 받기 위해 하는 것이냐?”라고 반문하곤 했답니다. 혁명을 좋아해서 한 것이지 고관이 되어서 고대광실에서 푸짐한 녹봉을 받으면서 안락하게 살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그 교훈은 의미심장합니다. 정치활동이 돈과 맞바꿀 수 있는 하나의 제도권 ‘직업’이 되는 순간, 그 활동을 통해 근본적 변혁을 이룰 수 없는 것이고, 근본적 변혁을 이루겠다는 큰 정치인은 끝내 자기 활동의 제도적 ‘정기화’를 예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관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공산당에 입당하는 이들이 생기는 순간, 그 공산당을 그냥 해체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런 공산당은, 어느 정도 안정화된 중심부 국가에서는 사민주의 이상의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이고 주변부에서는 스탈린 주의로 전락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변혁적인 정치도 그렇지만, 섹스라는, 몸둥이를 가진 이 중생의 최고의 쾌락도 ‘제도화’되면 점차 퇴색합니다. 더군다나 제도화에 의한 강제까지 생긴다면 ‘맛이 있는 섹스’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제대로 된 섹스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바로 그러기에 ‘부부 사이의 강간’이라는 개념은, 요즘 법적으로까지도 성립됩니다. 비록 서로에게 섹스를 제공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 부부라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섹스를 강제로 시킨다면 일반 강간과 다를 게 없는 흉악범죄일 뿐이죠. 물리력까지 동원해서 시킨다는 것은 법정이 다루어야 할 범죄지만, 사실 남편/부인의 ‘도덕적 권한’을 이용해서 상대방에게 섹스를 요구한다는 것부터 부질없는 짓이라고 봐야 합니다. 둘이 자율적으로 의기투합하여 하는 것이지 한 쪽이 다른 쪽에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논리의 연장 선상에서는, 저는 (적어도 고도로 발전된 복지국가가 아닌 경우에는) 성산업의 존재의 불가피성을 인식하지만, ‘돈을 주고 사는 섹스’에 개인적으 로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돈을 무기로 하는 ‘경제력에 의한 강간’, 즉 양쪽의 자율성이 충분히 보장돼 있지 않은 부자유한 성행위이기에 그렇습니다. 차라리 그러한 측면에서는 양쪽이 자율적으로, 좋아서 하는 혼외정사는 훨씬 더 바람직하고 도덕적입니다. 물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동등하게 혼외정사를 즐길 권리가 보장돼 있고, 혼외정사를 즐기면서도 가족 테두리 안에서 아동 양육 등의 문제를 아동에게 피해를 가하지 않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즐기면 된다는 이야기죠.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면 그게 벌써 ‘도덕’과 사이가 먼 일일 것입니다.

혁명의 순수성도 섹스의 즐거움도 돈이나 강요, 강제의 냄새만 나면 당장에 도망갑니다. 돈을 미끼로 하거나 힘으로 시키면 진정한 혁명도 맛이있는 섹스도 얻어낼 수 없는 것이죠. 그러면 학문은 과연 이와 다른가요? 창조성이 있는 진정한 학문 연구는 이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제가 지금 예컨대 1930년대에 하얼빈에 자꾸 왕래했던 이효석이나 홍종인, 전무길 등 경성이나 평양의 소설가, 신문 기자들이 하얼빈의 백계 러시아인들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 이국적 건물 양식이나 퇴락적 카바레들의 슬프면서도 계속 웃어야 하는 러시아 무희들의 얼굴 표정에서 뭘 읽어냈는지 궁금해서 관련 연구들을 하는 것이지 누가 저보고 “9월말일까지 연구 완료하여 논문 제출하라”고 애당초부터 명령을 내려 제 연구 진행의 시간적 범위 등을 타율적으로 규정했다면 아마도 처음부터 그 연구가 싫어졌을 것입니다. 연구도 사랑의 일종입니다. 낡은 신문, 잡지들의 냄새부터 과거 사람들의 위대한 발견과 위대한 편견까지 애착을 갖고 대하지 않는다면, 연구할 수는 없는 것이죠. 물론 김성수와 <동아일보>를 연구하는 학자는 고창 김씨의 재벌을 사랑할 의무는 없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 대한 ‘흥미’ 가 없으면 안되며, 고창 김씨들의 착취에 맞서 파업을 벌였던 경방의 여공들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죠. 하여간, 연구라는 것은 마음이 ‘댕겨져야’ 하는 것이고, 누군가가 타율적으로 규정하거나 강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에서는 결과 그 자체보다 자료 하나 하나 만지며 그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혁명이나 섹스와 상당히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 과연 국내의 소장파 인문학자 대부분이 ‘맛이 있는 섹스’와 비교될 수 있는 ‘맛이 있는 연구’를 천천히,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노무현 정권이 발족시키고 이번 정권이 계속 추진하는 ‘인문 한국 (HK)’과 같은 거대 프로젝트의 테두리 안에서는 소장파 학자들이 연구자로서의 ‘시한부 인생’을 살고 타율적으로 규정된 형태의 결과물들을 부단히 생산해내야 되는 것입니다. 결과물로서는 주로 ‘등재지 논문’만이 통하는 것이고, 이 등재지 논문의 일정한 편수를 연례 내지 않는다면 다시 고등실 업자나 ‘보따리 장수 (시간 강사)’로 전락돼야 되는 것입니다. 본인이 자료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아주 좋은 글을 천천히 쓰고 싶든, 자료를 크게 수집해서 아예 논문이 아닌 단행본 하나쯤을 2~3년 후에 내고 싶든, 일단 장기적 연구 계획 일환으로 먼저 2~3년 들여서 자료 정리부터 하고자 하든, 관리자들에게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일정한 양의 논문을, 일정한 기간 내에 써서 일정한 학술지에 발표하지 않으면, 무조건 나가라, 이것입니다. 연구 대상에 대한 흥미라든지, 연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방법론적, 이론적 고민이라든지, 장기적 연구라든지 – 이것은 관리자들에게 하등의 관심사도 안됩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당신의 학문적 관심을 무조건 우리의 규정에 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 시스템에서 탈락하라, 이것입니다. 자존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그러한 시스템의 테두리 안으로 아예 발을 들이지도 않을 것일 걸요. 문제는, 국내의 대단히 열악한 조건 하에서는 소장파 연구자들에게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생각을 할 만한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개인적 의향, 취향, 흥미 등등)과 무관하게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과연 위대한 학문이 탄생하나요?

저는, 이 ‘인문 한국학’ 시스템을 어느 정도 관찰한 뒤에 적어도 외국에서 학위를 받으신 국내 동료 제위께 다음과 같이 읍소하고 싶습니다. 최소한의 기회라도 있으시면 제발 귀국하여 이 지옥적 시스템의 포로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북미나 일본, 유럽에서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자율성을 누리면서, 훨씬 더 진정한 학술적 분위기에서 관련 분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성이란, 한 번 말살 당하면 다시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애국자라 하더라도 창조성을 씨말리는 이 학문의 도살장으로 제 발로 걸어갈 의무까지 없습니다. 가급적 귀국 거부를 해서, 한국 당로자들로 하여금 왜 이와 같은 두뇌 유출이 발생되는지를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게끔 해봅시다. 그게 진정한 애국일 걸요. 우리 저항이 없으면 저들은 끝내 정신 차리지 않을 것입니다.

윈도즈 설치할 때 “하드 디스크를 찾을 수 없다”는 에러

얼마 전에 둘째 형님이, 쓰던 HP 노트북이 고장이 났다고 해서, 윈도즈를 다시 설치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쯤으로 생각하고 내가 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 내가 가진 Windows XP 설치 CD는 HP 노트북에 설치가 안 되었다. 설치 CD-Key는 노트북 바닥에 스티커로 붙어 있으니까, 설치 CD는 일반적인 한글 Windos XP 설치 CD를 사용해도 돼야 하는데, 이놈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설치를 시작하면, 파일을 복사하다가 실제로 설치 과정을 시작할 단계가 되면, 하드 디스크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에러를 내고 더 이상 진행이 안 되었다. 하드 디스크를 교체해 봐도 증상은 같았다.

나중에 이유를 알고 보니, 그 HP 노트북은 SATA 하드 디스크 컨트롤러가 내장되어 있는데, 이 사타 컨트롤러에 맞는 구동 드라이버(driver) 파일이 윈도즈 XP 서비스팩3까지는 맞는 파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장 하드 디스크를 인식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했다. 이런 된장…

구글링을 해 보니, 한글 사이트에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영어 사이트에서 해결책 두 가지를 찾았다.

첫째는, “Microsoft’s Windows XP Home Install Setup did not find hard drive“에서 제시된 방법으로, 설치 시디를 넣고 각종 구동 드라이버 파일을 복사할 때 <F6> 키를 눌러 플로피 드라이브에서 추가 SATA 드라이버 파일을 넣어서 사타 하드 디스크 컨트롤러를 설치 프로그램이 인식하게 해서 정상적인 윈도즈 XP 설치 과정을 진행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노트북에 맞는 USB 플로피 드라이버가 없으므로 이 방법은 쓸 수가 없어서 통과!

둘째는, “Install Windows XP on SATA without a Floppy (F6)“에서 제시된 방법인데, 플로피 드라이버 없이, 윈도즈 설치 CD를 임의의 추가 드라이버 파일을 포함해서 다시 설치용 CD로 묶어 주는 유틸리티 사용법을 자세하게 안내해 주고 있었다. NLite

두번째 방법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리고 HP 노트북에 맞는 인텔 SATA 디스크 컨트롤러 구동 드라이버 파일을 인텔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하드 디스크에 풀고, NLite 실행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Windows XP 설치 파일과 다운로드 받아서 풀어놓은 인텔 사타 디스크 드라이버 파일을 순서대로 지정해서 새로운 윈도즈 설치 CD를 만들었고, 이놈을 CDRW에 구워서 HP 노트북에서 실행하니 윈도즈 XP 설치가 정상적으로 완료되었다.

HP 노트북의 내장 하드 디스크는 200GB였는데, C는 운영 체제만 설치할 생각으로 40GB만 잡고, D 드라이브에 각종 추가 프로그램과 데이터 파일을 만들기 위해서 150GB를 잡고, 마지막으로 10GB를 E 드라이브로 잡아서 고스트 백업 이미지 파일을 담아 두려고 파티션을 3개로 나누었다.

그리고 설치가 끝난 상태 그대로를 노턴 고스트를 실행하여, E 드라이브에 C 하드 영역에 설치한 윈도즈 상태를 그대로 이미지로 저장하는데 10여분이 걸렸고 파일 크기도 1.5GB정도. 테스트 삼아 고스트를 실행하여 E 이미지 파일로 C 하드에 복구해 보니, 5분도 걸리지 않아서 원래 상태가 복구되었다.

나는 윈도즈를 쓰지도 않는 맥 사용자인데, 많은 시간을 들여 왜 이 고생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해결책을 찾았으니 그나마 다행!